복잡한 인간사를 가장 다양하게 서술하였기 때문일 게다.
조선 도공들을 확보한 일본은 이들 덕분에 중국을 위협하는 자기 수출국으로 변모했고.추상화된 산(山) 모습을 꽤 닮은 문양이 있다.
17세기 말까지도 일본인들이 대량으로 구입했다.오늘날 사쓰마 도자기가 최고 명성을 누리게 된 것은 바로 이 도공들 덕분이다.백범 김구의 비판 들려오는 듯 백범 김구는 ‘나의 소원(1947)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모두 임진왜란 당시에 포로로 끌려가 일본의 도자기 산업을 일으킴으로써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외부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고.
조선백자의 전위성을 일찍이 발견한 사람은 현대미술의 거장 김환기였는데.
전위미술을 연상시킬 만큼 창의적 작품도 많다.그러나 전시에는 유교적 백자의 어두운 그림자도 있다.
1894년 여름』에서 조선의 공예품 수준은 일본은 물론 동남아와 비교해도 조악한 것이 많다고 적었다.도기(陶器)는 세계 여러 곳에서 만들었지만.
청화백자 자체가 푸른색을 좋아하는 아랍인의 취향에 맞춰 수출용으로 개발한 것이었다.현대미술 뺨치는 창의적 작품 빼어난 작가들 익명 속에 묻혀 상공업 경시한 주자학의 폐해 예술을 국부로 연결하지 못해 일본엔 이름 남긴 조선 도공들 일본 근대화의 밑거름 되기도 리움미술관 백자전 ‘군자지향 화제 전시를 기획한 리움미술관 이준광 책임연구원은 군자는 곤궁 속에서도 굳세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했다.